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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첫발 뗀 정신장애인 당사자연구를 만나다

은빛Angel 2017. 1. 23. 13:11

한국에서 첫발 뗀 정신장애인 당사자연구를 만나다

 

한울센터에서 2월부터 시작...“다른 곳에서는 없는 소통있어 좋아요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들여다보며 치료아닌 회복으로 가는 길

등록일 [ 201612021412]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스스로 정신장애를 연구하는 '당사자연구'는 일본 정신장애인 공동체 '베델의 집'에서 2006년 처음 시작되었다. 당사자연구는 정신과 의사나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이 아닌, 당사자가 자신의 증상과 그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에 더욱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사자연구를 통해 정신장애인은 자신의 병명을 스스로 붙이고, 환청이나 망상 등 '어려움'이 찾아올 때 '자신을 구하는 법'이 무엇일지 함께 고민한다. 당사자 연구는 현재 정신의학계와 같은 전문가 집단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당사자연구 모임을 만날 수 있다. 봉천동에 위치한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에서는 2월부터 당사자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 당사자들 열 명 남짓이 모여 자신의 증상과 어려움을 다른 당사자들과 공유하고, '자신을 구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벌써 열 달째 진행되고 있다 보니, 참가자들은 이미 서로의 특성에 익숙해져 있다.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에서 진행한 당사자연구에서 사람들이 '환청이 들릴 때 대처방법'을 직접 시연해보고 있는 모습.

센터 지하에 위치한 모임실에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중간중간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원이 점점 커졌다. 당사자연구는 '과제 점검'으로 시작됐다. 점검한 과제는 지난 시간에 계속해서 욕을 하는 환청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던 수정(가명) 씨의 것이었다. 수정 씨는 자신에게 욕을 하는 '환청 씨'에 맞서 자신도 욕을 해왔지만, 이러한 대응은 감정적으로 힘이 들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한다.

당사자연구 모임에는 환청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대응 방법을 공유했고, 그중 한 참여자가 '그럴 땐 음악을 듣고 그 소리에 집중하면 좋다'고 조언했다. 수정 씨의 과제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기분 전환이 되면서 환청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끝나는지 점검'해보는 것이었다. 수정 씨는 "옛날에 유행했던 노래, 김현정 노래나 박미경 노래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증상이 잦아드는 것 같다"고 했다. "음악 말고도 산책을 하면서 바람을 쐬거나 살아가는 것에 관해 생각하면 환청에 귀를 좀 덜 기울이게 돼요."

수정 씨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다. "대체 환청 씨(여자가 두 명, 남자가 한 명이다)들이 저에게 왜 그렇게 욕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저를 질투하는 것 같은데...전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대체 왜 질투를 하는 걸까요?" 수정 씨의 질문에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를 한다.

 

"그 사람들(환청들)에게는 수정 씨가 이상형일 수도 있잖아요."

"저에게 찾아오는 환청 씨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저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기분 나쁘게 하고 싶어서 말을 거는 것 같아요. "

 

환청 씨 때문에 약을 먹고 일상이 망가져도 '그 사람들'은 아무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고 하소연하던 수정 씨는, "아무 이유 없다면 나도 거기 휘둘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수정 씨는 여전히 환청이 찾아오면 흥분을 해서 맞서 욕을 하곤 한다. 당사자 연구 자리에서 제안된 '자기를 구하는 법'을 실생활에서 적용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수정 씨는 자기가 어떤 상태일 때 '환청 씨'가 잘 찾아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환청 씨'의 말에 귀를 덜 기울일 수 있는지, 무엇보다 환청 씨의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근(가명) 씨도 환청 때문에 힘들었다. 수정 씨의 환청은 욕을 해서 감정을 상하게 하는 형태였다면, 태근 씨의 환청은 계속 지시를 내리는 종류이다. 태근 씨는 스스로 대인관계를 맺는 것에 서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늘 환청 씨가 나타나 '그게 뭐야 좀 더 잘해야지'라며 태근 씨를 다그친다. 그러면 태근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하지만 태근 씨는 이제 환청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전에는 환청에 시달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결국 병원에 입원해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태근 씨는 '내가 왜 환청에게 당하고 살아야 하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고, '환청의 말이 전부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환청 씨가 '너 왜 그것밖에 못 해'라고 말하는 것이 신경 쓰이긴 해요.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말이 전부 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렇게 되니 환청이 들려도 한 번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태근씨와 같은 어려움을 갖고 있는 당사자들이 속속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태근 씨처럼 '환청이 전부가 아니라 삶의 많은 일 중 일부'라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착실하게 쌓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신을 구하는 법'이 공유되어야 할 것이다. 당사자연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화이트보드에 빼곡히 적어 내려가고 있던 송숙 정신보건사회복지사가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조금 번거로울 수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리스트로 작성해보면 어떨까요?" 태근 씨를 비롯해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다음 모임 전에 직접 해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연구의 어떤 점이 좋은지 묻자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냥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나만 이런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병원 상담은 시간이 너무 짧고, 주로 제가 증상을 설명하면 의사 선생님이 약 처방을 바꾸는 방식이니까요. 별로 속이 시원하지가 않아요." 하지만 당사자 연구에 오면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도 들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신질환을 '이겨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당사자연구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칠판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모습. 언제 환청이 들리는지, 환청이 들릴때 '자신을 구하는 방법', 고생의 패턴 등 당사자들이 직접 이야기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정신장애인의 '치료'가 아닌 '회복'을 지원하는 첫 발걸음인 당사자연구는 아직 한국에서 갈 길이 멀다. 한울 센터에서 당사자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송 복지사는 "지금은 그저 다양한 분들은 한 데 묶어 당사자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연령이나 증상 등으로 세분화해서 당사자연구를 진행하려 한다"고 전했다. 다양한 정신과적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특정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야기에 참석하지 못한 채 듣고만 있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당사자연구에서 나온 '자기를 구하는 방법'이 모임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만 막상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는 잘 생각이 안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사자연구의 '성과'는 물리적으로 재단하기 어렵다. 기한을 정해놓고 그 안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사자연구의 목적은 치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에 걸쳐 드러날 수도 있다. 꾸준히 당사자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재원 조달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은 대부분 정량적 평가에 기반해 '무엇을 얼마만큼 얼마 만에 이뤄냈는가'를 기준으로 지원된다. 당사자연구가 '효율성'을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인정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신장애인이 자신의 '어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는 당사자연구는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토양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땅을 일굴 때, 사회도 해야 할 몫이 있다. 툭하면 '정신병' 탓을 하며 사회의 많은 문제를 손쉽게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려버리는 안이함, 정신장애인은 위험하고 귀찮으므로 '정상'인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편견을 깨는 노력이다.

 

최한별 기자 hbchoi1216@beminor.com